부처님 전에

적멸보궁(寂滅寶宮)과 금강계단(金剛戒壇)

황보근영 2023. 4. 27. 09:40

적멸보궁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진신사리란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이고, 그 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은 바로 석가모니불의 참 몸(眞身)이 직접 계신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통도사를 불보(佛寶)사찰이라 이름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적멸(寂滅)이란 열반(涅槃)의 다른 말로 미혹의 세계를 영원히 벗어나 무한한 안락의 경지에 도달한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 진신사리탑

 적멸보궁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그 어떤 물건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을만큼 가장 굳세다는 의미이다. 곧 반야의 지혜는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깨뜨릴 수 있기에 이 '반야의 지혜'를 금강석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참배하는 사람은 불상이 없는 참배단을 향하여 불단에 촛불을 켜고 향을 올리고, 사리탑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면 된다.

통도사 금강계단 참배단

진신사리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어 다비를 마치고 나니 8곡4두(8斛 4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나와서 불교와 인연을 맺어온 8나라 임금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왕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사리탑을 세워 길이 공양하게 되었다. 그뒤 아쇼카 왕때는 84,000개의 사리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대당 서역기]에 의하면 현장 법사가 150립(粒:개)의 사리를 중국으로 가져 갔고, 의정(義淨)스님도 300립의 사리를 가져 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 진흥왕 10년(549년)에 양(梁)나라에서 사신이 처음으로 불사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뒤 안홍(安弘)이 진나라에서,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가져와서 지금은 전국에 진신사리가 많지만 최초로 진신사리를 봉안한 경북 선산의 태조산 도리사(해동 최초 가람)에 모셨고 이후 5군데를 정하여 봉안하였다.
  이를 "5대 보궁(5大 寶宮)"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다.

  •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 강원 오대산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
  • 강원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
  • 강원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 강원 영월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
강원 영월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층석탑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이 절 모든 법당의 중심이 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앞에 팔작지붕을 T 자형으로 교차한 금당을 짓고 불이문을 지나 들어가면서 보게되는 금당의 동쪽현판에는 '적멸보궁',  정면의 남쪽 현판에는 '금강계단' 그리고 삼성각 앞의 서쪽현판에는 '대웅전'이라 현판하였다. 대웅전 주련(柱聯)에는 부처님의 사리와 정골(頂骨) 등을 가져와 금강계단을 만들고 이 절을 지은 자장율사(慈藏律師)의 불탑게(佛塔偈)가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寂幾千秋
만대의 전륜왕은 삼계의 주인이라.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년이던가.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

 
 세상에는 밝혀야 될 것도 있지만 그대로 간직해야 할 것도 있다. 사리는 바로 그대로 간직해야 할 영물이지 물질적으로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신비의 자리에 속하는 사리에 대해서 오로지 엄숙한 마음으로 받들어야 할 뿐이다.

통도사 금당, 금강계단
통도사 금당, 적멸보궁
통도사 금당, 대웅전

 
[더 읽기]  - 부처님 쌍림열반과 진신사리 - 부처님의 열반상 유래
 

올해(2016년)는 불기 2560년이다. 부처님 탄생이나 정각이 아닌 부처님 열반을 기준으로 하는 불기는 육도윤회의 고리를 끊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팔상도의 마지막 화폭 ‘쌍림열반상’<사진>은 부처님 열반에 관한 불화다. 열반에 드는 부처님의 모습과 슬퍼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화폭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보면, 오른쪽 하단에 열반에 든 부처님을 중심으로 슬픔에 잠긴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불본행경> ‘대멸품(大滅品)’에 보면 대중과 유행하던 부처님은 쌍수(雙樹)에 이르러 아난에게 침상을 펴라 이르셨다. 부처님께서는 침상에 올라 오른쪽 옆으로 누워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머리를 북쪽에 두고 다리를 포갰다. 부처님께서 누워계신 장면은 곧 열반상으로 귀결되는데, 부처님께서는 머리를 북쪽으로 둔 이유에 대해 <증일아함경> 제36권 ‘팔난품(八難品)’에서는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불법은 북천축(北天竺)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대중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다. <불설장아함경> 권4 ‘유행경’에 따르면 모든 비구들은 구슬피 통곡하고 기운을 잃어 몸을 땅에 던져 뒹굴고 부르짖으면서 큰 법이 사라졌음을 한탄했다. 경전처럼 그림에서도 땅에 누워있는 비구의 모습이 확인된다.
왼쪽 하단에는 부처님의 관 위로 엎드려 있는 스님과 관 주변에 여러 명의 스님이 서 있다. 이 장면은곽시쌍부(槨示雙趺)를 
표현한 것이다.

‘유행경’에 따르면 부처님 법구는 500겹으로 감싸진 뒤 황금관 안에 넣어진 뒤 다시 쇠곽에 넣고, 마지막으로 전단향나무로 짠 덧관에 넣어졌다. 다비를 하려 불을 붙였지만, 관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때 가섭존자가 500명의 제자와 함께 서둘러 도착했다. 가섭이 부처님 몸을 다시 뵙길 청하나, 아난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어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가섭이 다가가자 부처님께서 두 발을 나란히 내밀어 보였다. 가섭이 예배하자 발은 사라지고, 관이 저절로 타올랐다.
화면 상단은 불에 타오르는 부처님의 관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오색광명이 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장면과 그 아래로 화불이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다비 후 불사리가 떨어져 이를 받아모으는 모습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불본행경> ‘팔왕분사리품(八王分舍利品)’을 보면, 일곱 국왕이 부처님 사리를 얻겠다고 군사까지 일으키자, 전쟁의 일촉즉발 위기 속에 향성이란 바라문이 중재에 나섰다. 부처님 제자로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설득한 향성 바라문은 사리를 여덟 등분으로 나눠, 사리를 지키고 있던 역사와 일곱 국왕에게 평등하게 나눠준다. 사리를 이운해간 국왕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탑을 세웠는데, 향성 바라문은 사리를 나누던 항아리를 봉안해 탑을 세우고, 귀족 바라문들은 재를 모아 탑을 세워 총 10개의 탑이 조성됐다고 한다. 화면에서 사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는 이가 바로 향성 바라문으로 보이며, 그의 지시에 따라 항아리마다 사리를 나눠 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불교신문3195호 /2016년4월20일자]

쌍림열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