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과 수기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이야기

황보근영 2023. 6. 30. 11:29

가족이래야 아내와 딸 하나, 그렇게 셋 뿐인데 정말 오랜 만에 온 식구가 하나가 되어 여행을 갔다. 2014년 어느 가을날, 관광버스에 의지하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를 찾았다. 올라갈 때의 길은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었지만, 오대산 단풍이 '너무 예쁜' 바람에 딸래미와 엄마(아내)의 관계가 뒤틀려서 번뇌가 더 쌓였던 길을 묵언으로 내려왔다. 번뇌를 없애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자 다시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고 싶다.
그런데 문득, 월정사와 상원사의 관계가 궁금했다. 물론 별개의 두 사찰이지만, 둘이면서 하나로 묶는 그 연(緣, 連)이 뭘까? 그것이 '선재의 길'이든, '문수동자와의 인연'이든, '엄마와 딸'이든 그 하나를 찾고 싶다.
     
월정사(月精寺)는 오대산하면 떠오르는 사찰이자,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25개 교구 중 제4교구의 本寺로 여러 末寺를 거느린 거대 사찰이다. 강원도에는 속초의 新興寺와 더불어 두 개뿐인 본사이다. 그런데 月精寺에 대한 인식의 역사적 변천과 그 의미․신성환 9 신흥사는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1934년에 덕인스님이 창건한 절4)로 이른 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사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라시대에 창 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월정사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강원도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 상원사(上院寺)는 국가가 주도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는 곳이었고, 세조의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지원을 받는 사찰이었다. 불교 혁파의 과정에서 교종의 중심 사찰로 지정된 것도 월정사 가 아닌 상원사였다. 이후 월정사가 상원사를 압도할 정도로 규모를 확장했음에 도 불구하고, 오대산을 방문했던 대다수의 문인들은 오대산 불교의 중심을 상원사나 중대 적멸보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월정사의 역사 에 대한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월정사가 강원도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면서부터 지금과 같이 강원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 했다고 할 수 있다. ...
 
월정사와 상원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단원 김홍도 (1745~1806?)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 그것이다. 전체 60장으로 구성된 금강사군첩은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하여 중대 적멸보궁과 오대산 사고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 발췌 : 月精寺에 대한 인식의 역사적 변천과 그 의미 / 신성환(2017,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상원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234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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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입구
상원사 문수전

1) 상원사, 문수동자와 세조 설화
세조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顯德)왕후의 저주를 받아 창병으로 고통 받았다. 그런 중에 던 상원사 앞 계곡물에 목욕하다가 문수동자를 만나 병이 치료되었다. 이로 인해서 세조는 국보 제221호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을 조성하고, 자신의 피고름이 묻은 어의를 복장에 봉안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 보물 제739호로 지정되어 있는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중 명주적삼과 생명주적삼이라는 것이다.66) 또 상원사의 입구에는 세조의 목욕을 방증하는 유물로 '관대(冠帶)걸이'라는 석조대(石造臺) 유적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상원사중창기>와 <상원사중창권선문>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개연성이 있어 주목된다.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

만일 세조가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창병이 치료되어 문수동자상이 조성된 것이라면, 이 보살상의 복장 발원문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조가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1984년 7월 19일의 복장 개봉을 통해 드러난 <의숙공주발원문, 懿淑公主發願文>은 전혀 다른 상황만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1466년 2월에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懿淑)공주와 남편 정현조(鄭顯祖)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득남을 위해서 문수동자상을 조성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즉 여기에서의 문수동자는 세조가 친견한 대상이 아니라, 의숙공주와 정현조에 의한 '득남의 기원대상'일 뿐인 것이다.
신라하대 오대산의 신앙구조를 확립하고 상원사를 창건하는 인물은 보천과 효명이다. 이들은 상원사에서 신이한 종교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문수보살이 36가지로 변현(變現)하는 이적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수동자에 대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세조가 문수에 의해서 창병이 낫게되어 문수동자상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설화일 개연성이 크다.
<상원사중창기>에 의하면, 정희왕후와 신미에 의해서 상원사가 세조의 원찰로 중창되는 원인은 10일 동안 지속된 세조의 병환이었다. 그러나 <상원사중창기>에 등장하는, '세조가 10일 동안 앓았고 이후 상원사중창이 본격화되자 차도가 있었다는 병'은 창병은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상원사 중창기>의 흐름을 보면, 정희왕후가 붓다의 가호를 구해서 극복하고자 한 병은 창병과 같이 고질적인 병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급박한 병으로 판단되기때문이다.
이외에 세조의 상원사 목욕설화와 관련해서는, 현재에도 상원사 입구에 세조가 목욕을 위해서 의관을 벗어놓았다는 관대걸이 유적이 있다. 관대걸이는당시에 세조의 목욕을 미리 예상하고 만들어 놨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연히 후대에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세조가 목욕을 했다고 하더라도 대소의 많은 종친과 신료들을 대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조의 의관이 바닥에 놓였을 리는 만무하다. 즉 목욕이 사실이더라도 어의는 어가 등에 보관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세조의 어의와는 무관한 다른표지석이 후대에 변형되어 이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세조가 어의를 하사한 내용과 <의숙공주발원문> 등에 근거해 볼 때, 세조의 목욕과 문수친견은 후대에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다.

발췌)세조의 금강산과 상원사 거둥에서의 신이영응 설화에 대한 검토 - 상원사중창과 강원도 거둥을 중심으로.
염중섭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불교학연구 (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1호(2017.6)pp.61~90)

2) 상원사, 고양이 석상 설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상원사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사육신 쪽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기 위해서 불단 밑에 숨어 있었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상하게 여긴 세조에 의해서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고양이를 잘 보살펴주라는 의미에서 강릉에 땅이 하사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묘전(養猫田)' 또는 '묘전(猫田)'이라는 것이다. 또 상원사에는 현재도 고양이 석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또한 세조를 구한 고양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문수전 앞, 고양이 석상

그런데 고양이 설화에 대한 부분을 검토해 보자. <상원사중창기> 에는 다음과 같이 상원사가 관할하는 강릉에 위치한 논의 유래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강릉에는 예로부터 봉전(葑田) 수백결이 있었는데, 학열공이 청하여 상원사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봉전을 개간하여 수전(水田, 논ㆍ苗)이 되도록 하고, 파종하여 해마다 수백석을 수확해 (상원사)의 경상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 기록을 보면 강릉의 논이 묘전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전은 '줄'이라는 풀의 뿌리가 여러 해 얽히고 쌓여 그 위에 흙이 올라가 형성된 받을 의미한다. 이렇다보니 봉전은 물이 많고 논으로의 전환도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와 동시에 물이 많다는 의미에서 봉전이 묘전으로불리웠을 개연성이 있다. 이러한 묘전의 발음이, 언젠가 만들어지게 되는
이 설화와 결합하면서 猫田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현재 상원사 문수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고양이 석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은 사자를 보지 못한 장인들이, 사자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뿐이다. 실제로 경주 분황사모전석탑(국보 제30호)의 암사자는 물개모양으로 만들어져 속칭 물개로 불린 일이 있으며, 남산 탑골의 부처바위(탑곡 마애불상군, 보물 제201호)에 부조된 수사자는 천마로 오인되기도 했다. 또 송광사 일주문 등에 조각된  石사자는 레밍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상원사의 고양이상을 자세히 보면, 지금도 한 마리의 목에 갈기를 표현한 두툼한 측면이 확인된다. 고양이는 암수의 외형적인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는 사자에 대한 졸렬한 표현에서 온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조의 상원사 거둥에는 많은 종친과 군신들이 대동되었다. 또 학열과 상원사 및 오대산불교 전체의 입장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낙성식의 주불전 불단에 자객이 매복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이다. 또 만일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낙성식을 주관한 학열 등에게 죄를 묻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원사중창기>에 따르면 학열은 낙성식 날과 그 다음날인 18일에 세조로부터 치하를 받고 있다.  특히 18일의 치하는 학열 등 공로가 큰 승려들이 오대산 행궁으로 가서 사은을 받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필요가 있다. 이는 세조가 학열이 주도한 상원사중창 및 낙성식과 관련해서매우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8일을 마지막으로 세조는 오대산을 떠나게 된다. 즉 현존하는 기록의 정합성에 따르면, 세조의 상원사 거둥에는 어떠한 시해기도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중국불교의 전통 속에서 불전 앞에 암수의 사자를조각하는 표현이, 사자를 보지 못한 장인에 의해서 고양이처럼 조성된 것을 원인으로 후대에 파생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3)상원사 봉황 보당

이 상원사의 봉황 보당(鳳凰寶幢)은 인광 스님이 불사의 전통미와 사상을 재해석하여 봉황으로 보당을 조성했다고 한다. 지주에는 용과 호랑이를 조각했고, 지주 기단은 거북이로 만들었다. 보당(寶幢)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의례용으로 다는 깃발이다. 보당을 당간(幢竿)에 거는데, 당간을 지탱하는 기둥은 지주(支柱)라고 한다. 상원사에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지주가 있는데, 이 지주는 세조가 상원사에 참배할 때에 왕을 상징하는 어룡기(御龍旗)를 달았던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상원사의 봉황보당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 동종
상원사와 월정사를 잇는 선재길(9km)
선재길 섶다리

 
월정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058

월정사(月精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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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불유각

대법륜전, '큰 법을 굴리는 집'이란 뜻으로 사찰에서의 강당을 의미한다.석가모니께서 정각을 이룬 후 녹아원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한 역사적 사실에서 당호의 이름을 지었다. 1층에는 강당이 지하에는 공양채가 있다.

아래 > 월정사 대법륜전선불장 주련(月靜寺 大法輪殿選佛場 柱聯)과 풀이

 諸佛大聖尊 (제불대성존)
모든 제불 부처님 대성존께서

 敎化衆生者 (교화중생자)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심에

 三千大天中 (삼천대천중)
온 우주 삼천대천 세계 가운데

 內外諸音聲 (내외제음성)
내외의 모든 음성 다 들으시고

 度脫諸衆生 (도탈제중생)
모든 중생 제도하사 해탈케 하여

 入佛無漏智 (이불무루지)
부처님의 무루지에 들게 하시네

월정사 대법륜전
전나무 숲길 맨발 걷기
'월정사 대가람',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