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에서, 김구와 답설야중거
백범 김구선생이 삭발수계하고 스님이 되어 수행하셨다는 마곡사에 들렀다.
그 곳을 들리기 전에 선생이 즐겨썼다는 <답설야중거> 오언절구 행서를 임서했다.
답설야중거ᆞ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ᆞ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에
함부로 걷지말라.
오늘 내가 남기는 발자욱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되나니."
서산대사의 시라고 알려졌지만 이양연의 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겨울 아침이라 찾는 이 없는 가운데 절마당 한가운데 한가로운 사미인양, 삽살개가 반갑게 길 손을 맞아준다. 내 가는 길을 돌아보게한다.
주 금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이고 그 뒤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있다.
큰 삽살개가 대광명전 앞 마당에서 나를 맞아준다.
대광명전 왼편에 김구선생을 위한 백범당이 있다. 찬바람 들어갈까, 주인 허락받지 않고 결례될까 저어하여 방문을 열어보지 못했다. 언제 따뜻한 날이 오면 다시 올 날있겠지라며 미룬다.
마곡사와 백범 김구
ㅡ마곡사 홈페이지 에서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 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http://www.magoksa.or.kr/bbs/content.php?co_id=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