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작은 암자에 들렀습니다. 말이 암자라지만 벼랑에 쪼그리고 앉은 작고 초라한 오두막집이었습니다. 비로암에는 그렇게 닮은 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니 온 듯 다녀 가려고 조용히 들렀는데 귀 밝은 선승이 문을 열고 나오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마루에 걸터 앉아 땀을 닦고 배낭 속의 방울토마토를 꺼내서 같이 들자며 권했습니다. 스님께선 먹을 때가 안 되었다며 사양하셨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권하니 이번엔 계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쭸습니다.
"혼자 계신데 무슨 계율입니까? 누가 뭐랍니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죠."
그냥 소박한 모습대로 쉽게 사시는 줄 알았더니 칼을 지닌 선승이셨군요. 또 여쭙니다.
"왜 이렇게 높은 산 중에 혼자 올라 오셔서 사십니까?"
"뭐 그야 모르죠."
저 산아래 대각암의 청각스님께서도 '모른다'는 말씀을 잘 하시더니, 이곳의 풍이 그런가 싶네요. 그러시면서 도로 제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여기 왜 왔습니까?"
"예, 저는 이 산너머 송광사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요. 저도 '가는 중' 입니다."
스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셨습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스님도 나도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스님은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가는 중'이라 대답하셨습니다.
'하하, 가는 중(中), 가는 중(僧)?'
송광사로 넘어가는 내내, '가는 중' 이라는 말 꼬리를 붙잡고 실없이 물어봅니다. 정말 기 막히는 대답입니다.
........
참 오래 전의 일이죠.
그 사이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네요. 아직 가야 할 때가 멀었지만, '먼길 가려면 가볍게 가자'며, 앨범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교직생활, 웨딩포토, 육아앨범, 여행앨범..
20여권이 되네요. 이제 추억으로 남기고 애써 지니고 다니지는 말자며 며칠째 분리하여 쓰레기로 '배출 중'입니다. 산다는게 쓰레기를 남기는 것인가봐요. 앨범 속에서 옛날 학교 교지에 실었던 그 글이 있기에 추억삼아 여기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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