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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수기12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를 찾아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개창되고, 혜공왕 10년 774에 완성되었다. 조선 선조 26년 1593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된 탓에 일본군에 의해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웠고, 1969~1973년 처음 건립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서 길이 90여m 되는 석축과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위에 자하문紫霞門, 대웅전大雄殿, 무설전無説殿이 남북으로 놓였고, 석가탑釋迦塔, 다보탑多寶塔이 서 있다. 그 서쪽에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賓橋, 안양문과 여래좌상 금동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다.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다... 2024. 3. 4.
불국사 극락전 복돼지와 안양문 고향에 왔다 친지 가족들과 다시 불국사를 찾았다. 예전에 보지못했던 재밋거리를 봤다. 극락전 현판 뒤에 복돼지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해설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두운 그늘을 따라가니 단층칠을 하지않은 돼지머리가 보였다. 미간을 좁혀 눈을 밝히니 주둥이가 길고 위로 쏫은 송곳니와 흰자위가 뚜렷한 큰눈의 맷돼지가 극락전 현판 바로 뒤에 숨어 있었다. "아니, 숨긴 누가 숨었어요? 나는 본래부터 여기 있었던 주인공인 것을, 나그네인 당신들이 이제서야 나를 찾은거지요"라며 낄낄 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극락전 極樂殿 이 건물은 금동아미타불좌상 국보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이 거주하는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한다. 임진왜란 때 건물은 불타고 돌 기단만 남았다. 1750년 남은 기단 위.. 2024. 3. 3.
불교 ㆍ 사자성어 ㆍ 빈자일등 현우경 ㅡ 출전 古典속의 삶의 智慧 - 貧者一燈(빈자일등) 貧 : 가난할 빈 者 : 놈 자 一 : 한 일 燈 : 등불 등 [출전] : 賢愚經(현우경) [풀이] :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가난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부처님에게 바친 등불 하나가 부귀한 사람들이 바친 만개의 등불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으로 많은 보시(布施)보다도 참다운 마음과 정성이 소중하다. 석가모니가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 나라에 난타(難陀)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 각기 자기 분수에 맞게 석가모니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아무 공양을 할 수가 없구나" 난타는 어떻게 해.. 2023. 9. 22.
마곡사에서, 김구와 답설야중거 백범 김구선생이 삭발수계하고 스님이 되어 수행하셨다는 마곡사에 들렀다. 그 곳을 들리기 전에 선생이 즐겨썼다는 오언절구 행서를 임서했다. 답설야중거ᆞ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ᆞ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에 함부로 걷지말라. 오늘 내가 남기는 발자욱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되나니." 서산대사의 시라고 알려졌지만 이양연의 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겨울 아침이라 찾는 이 없는 가운데 절마당 한가운데 한가로운 사미인양, 삽살개가 반갑게 길 손을 맞아준다. 내 가는 길을 돌아보게한다. 주 금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이고 그 뒤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있다. 큰 삽살개가 대광명전 앞 마당에서 나를 맞아준다.대광명전 왼편에 김구선생을 위한 백범당이 있다. 찬바람 들어갈까, 주인 허락받지 않고 결례.. 2023. 8. 30.
사자산 법흥사와 5교 9산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을 찾았다. 사자산, 어디서 들어 본 말이다. 사자가 서식하지도 않은 이 땅에 웬 사자산일까? 부처님 앉은 자리가 바로 사자좌라 칭한다. 사자에 대한 의문보다 고등학교 학창시절 국사과목에서 암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자산, 그래! 신라말 고려초 시대에 교종과 선종은 5교 9산으로 불렸지. 9산 중에 사자산이 있었어." 그 사자산을 찾았다. 9산의 사자산 흥영사가 바로 지금의 법흥사였다.5교 9산신라 및 고려 전기의 불교종파로서 5개의 교종과 9개의 선종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삼국시대 말기까지 교종 종파인 오교(五敎)가 형성되었고,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종(禪宗)의 구산문(九山門)이 형성되어 통일신라 및 고려 전기의 불교계를 총괄하였다. 오교는.. 2023. 8. 29.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이야기 가족이래야 아내와 딸 하나, 그렇게 셋 뿐인데 정말 오랜 만에 온 식구가 하나가 되어 여행을 갔다. 2014년 어느 가을날, 관광버스에 의지하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를 찾았다. 올라갈 때의 길은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었지만, 오대산 단풍이 '너무 예쁜' 바람에 딸래미와 엄마(아내)의 관계가 뒤틀려서 번뇌가 더 쌓였던 길을 묵언으로 내려왔다. 번뇌를 없애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자 다시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고 싶다. 그런데 문득, 월정사와 상원사의 관계가 궁금했다. 물론 별개의 두 사찰이지만, 둘이면서 하나로 묶는 그 연(緣, 連)이 뭘까? 그것이 '선재의 길'이든, '문수동자와의 인연'이든, '엄마와 딸'이든 그 하나를 찾고 싶다. 월정사(月精寺)는 오대산하면 떠오르는 사찰이자, 한국 불교의 대.. 2023. 6. 30.
마리아 보살상을 그리다. 2010년 5월 7일 길상사를 찾았다. 아니, 법정스님을 찾았다. 지난 2001년 스님께서 사람 발길 없는 강원도 산골로 떠나신 다음에야 조계산 불일암을 찾아 갔듯이, 이제서야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스님을 뵈러갔다.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랄 수 있는 를 배낭에 넣고서. 언제 다시 뵈올지 모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신 뒤에야, 멀지도 않은 성북동 길상사를 이제야 찾았다. 스님을 뵐 수 없었지만 스님의 가르침을 읽었다.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머무시면서 세상 인연을 벗어나셨다는 행지실 담장을 넘어 바라보면서 스님을 친견한 것으로 위로했다. 절 마당에는 수많이 많은 등(燈)으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관세음 보살상 앞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간 차와 빵을 먹었다. 관세음보살상과 눈을 마주하면서 그녀(?)를 그렸다.어머니를 .. 2023. 5. 28.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 스님들 세계에서 '시인의 마을'로 통하는 절이 있다. 내소사(來蘇寺)이다. 내소사를 찾아 들어가는 전나무 숲 길이 눈에 선하다. 그때가 2000년이던가 2001년이던가?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 왼쪽으로 벗어나 부도 탑비전있다. 여기에서 본 비문은 아직도 나의 화두(話頭)다. 앞쪽에는 ‘海眼凡夫之碑(해안범부지비)’라 적혀있고, 뒷쪽에는 이렇게 음각되어있다.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어시 시무생사) "삶과 죽음이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삶과 죽음이 없다" 해안(海眼,1901~1974)스님은 평생 화두참구로 일관한 선승(禪僧)이며, 제자들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참선공부와 포교가 한국불교의 방향임을 강조하며 정진하셨다. 해안스님은 돌아가시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에 새길 글을 직접 정해주셨다. 이 글이 바로.. 2023. 5. 9.
圓覺卽是 - 삶과 죽음이 있는 지금 바로 여기 (글쓴 때, 2008.08.01)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 법보사찰 해인사는 소위 우리나라의 3보 사찰이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서는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곳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이 있고 그 뒤에 법보전(法寶殿)이 있다. 법보전 입구 좌우 기둥에는머리가 쨍하게 열리는 깨달음을 주는 주련이 걸려있다.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도량이 어디있을까? 삶과 죽음이 있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자문자답이다. 무슨 해석이 따로 있을까? 하지만 아직 '나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도 밝음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간절히 구하지 않아서 인가? 욕심이 과한 까닭인가? 하여 붓을 들어 놀렸으며, 해인사에서 얻은 '각명(覺明)'으로 남겼다. 2023.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