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의 한암스님
한암 대종사(1876~1951)
1950년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 전쟁으로 민족의 분단은 더욱 더 고착화되었고, 남북 간의 이념 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문화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실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북진을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다. 마침내 국군은 38선상에서도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고, 주민들도 다시 피란을 가야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오세요!”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불을 놓는 것이니 불을 놓으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마땅히 절을 지켜야 돼. 너희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을 따라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질러라.”
절의 소각을 전해들은 한암스님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중앙에 가부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에게 이제 되었으니 불을 놓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승과 장교는 상원사 소각을 놓고 눈에 핏발이 선 대결을 하였다. 장교의 옆에 있는 사병이 “이제 끄집어낼까요?”라고 말을 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한암스님의 상좌와 보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장교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부탁하였다. 잠시 후,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한 장교는 “이 스님은 보통 스님이 아니다. 도인 스님이 분명해.”라고 말을 하면서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 법당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장교는 절을 태웠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절의 문짝을 태워 연기라도 내야 하겠다는 양해를 노승에게 얻었다. 장교는 부하 사병들에게 상원사의 문짝 수 십여 개를 떼어내서 마당에 놓고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문짝을 태운 검은 연기는 상원사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원사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을 다 태운 장교는 불을 놓았다는 증거로 노승이 옻칠한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상원사를 내려갔다. 한암스님의 생사불이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 절의 수호 정신으로 상원사는 기적적으로 소각을 면한 것이다. 당시 한암스님의 말을 듣고 소각 중지 명령을 내린 그 중위의 신상은 전하지 않고 있다.
상원사와 문화재를 지킨, 한암스님은 누구인가?
한암스님의 죽음으로 맞선 기세와 지혜로운 국군 장교의 결단으로 상원사는 건재하였다. 그로 인하여 상원사의 문화재, 즉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문화재들은 조선시대 세조가 상원사에 행차하여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기연으로 인하여 조성되거나 이운된 것이었다.
상원사 문화재를 수호한 한암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근대 고승, 큰스님이다.
발췌>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911&bbsId=BBSMSTR_1008&nm=NS_01_10
ㅡ 탄허스님 이야기 벽화
탄허 대종사(1913~1983)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 법명은 택성이며 법호가 탄허이다. 어려서부터 한문학 전 과정을 마치고 열다섯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출처> http://woljeongsa.org/bbs/content.php?co_id=102030&tabs=9
ㅡ지암 스님, 이야기 벽화
1911년 일제가 조선 불교를 장악하려고 하자 총본산 건립을 주도해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고,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현 대한불교조계종)을 설립해 동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후학을 양성시키는 등 조선 불교와 종단의 맥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스님은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해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서울로 다시 파견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운동의 최일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3월3일 이탁 등과 27결사대의 일원으로 을사오적 등 매국노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출옥 후인 1923년에는 다시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과 연루돼 함흥감옥에서 3년 동안 복역하게 된다.
그러나 1941년 조계종 초대 종무총장에 선임된 지암 스님은 히로다 쇼익(廣田鐘郁)으로 개명하고 일제의 대동아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다. 이 같은 이유로 지암 스님은 해방과 함께 발족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에서 부일협력자 제1호로 지목돼 승권 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해 11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주석 등이 귀국하면서 “지암 스님의 자금조달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고 증언하면서 스님은 징계에서 벗어나 다시 종단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1950년 스님은 강원도 평창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의 근현대 격동기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던 지암 스님은 1969년 11월3일 세수 86세, 법납74세로 입적했다.
발췌>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452
더읽기> http://woljeongsa.org/bbs/board.php?bo_table=104010&wr_id=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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