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마당에는 돌로 만든 등(石燈)이 많다. 밤을 밝히는 등(燈)의 기능을 위해 두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사바세상을 살아갈 적에 세상과 길을 가르쳐주는 지혜의 등불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면서 가람의 중앙을 상징적으로 밝혔다. 조형미가 아름다우며 예술적인 가치도 무척 높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아주 옛날에도 이미 동제(銅製), 철제(鐵製), 와제(瓦製), 목제(木製)의 다양한 등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우리나라의 석등은 이미 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실로 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을 밝히는 등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부처님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이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며 제자이며 시자(侍子)인 아난다는 부처님이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 걱정은 태산이며 마음은 항시 초조하였다. 그래서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 스승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시면 저희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제자는 부처님께서 혼탁한 이 세상과 어리석은 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하실 때까지 영원히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하지 못하고 태어난 것은 모두 반드시 죽기 마련이며,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인 것을 깨달아서인지 석가모니 부처님을 붙잡지 아니하고 떠나실 것을 미리 염려하며 슬픈 마음으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아라.
내가 이세상을 떠나면 나에게도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니라.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의지할 것이며, ~ 자등명(自燈明)
나의 가르침인 법의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의지할 것이니라." ~ 법등명(法燈明)
불교 행사에는 불을 많이 쓴다. 향불을 피우고, 촛불을 켜고 연등을 달아서 어두움을 밝힌다. 이와 같이 불을 밝히는 것은 모두 밝은 빛으로 어리석은 무명(無明)을 몰아내고 깨달음의 광명을 내 마음 속에 불어넣기 위한 소망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내 마음의 등불이 환히 밝으면 그 어둠은 물러가고 밝은 깨달음의 광명이 꼭 올 것이다.
[석등의 세부 명칭]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석등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안내판 설명]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 조사가 조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으로, 높이가 6.36m이다. 석등의 형태는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고 하는 우담바라화의 꽃잎인데, 이 꽃은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꽃의 8잎은 팔정도[정견(正見),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명(正命), 정업(正業), 정어(正語), 정사유(正思惟), 정정 (正定)]이고, 화창(火窓) 넷은 사성제[고집멸도(苦集滅道)]와 부처님의 광명이며, 북의 모습은 진리의 소리이다. 곧 8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고,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의 등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로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문화재 설명]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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