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새소리, 떨어지는 나무 잎새에 감상이 젖고 가파오는 숨결에 구도의 일념이 흐릿해져 갈 때쯤이면 수미산 중턱에 다다랐다.
이제 이 구도자는 수미산 중턱에서 부처님 세계를 사방으로 수호하는 네 분의 천왕님이 계신 천왕문에 발을 내딛는다. 어린 마음에는 크나큰 덩치에 눈을 부릅뜨고 창, 칼을 들고 계신 분들이라 무서운 생각이 들어 피하고 싶었지만 실은 사천왕님은 착한 이를 도와주고 악한 이를 꾸짖는 고마운 분들이시다. 무섭다는 생각을 떨치고 눈여겨 바라보면 그분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상통하여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한분 한분 차례로 우러러 뵈며 합장하여 인사드린다. 이로써 구도자는 청정일심을 다시 다잡아 청정도량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니 가슴이 벅차기만 하다.
부처님 전에 다가가는 산사의 두 번째 문인 천왕문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받던 귀신들의 왕으로서 지국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증장천왕의 네 분의 천왕을 모셨다하여 사천왕문이라고도 부른다. 사천왕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해인사의 천왕문은 맞은 편의 창방위 안쪽에 '봉황문(鳳凰問)'이라고 써 붙인 편액을 붙여놓았다.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이 세계를 크게 둘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깨달음의 세계(悟界)"요 또 하나는 "헤맴의 세계(迷界)"이다. 이를 다시 십계(十界)로 나누면, 1)지옥 2)아귀 3)축생 4)아수라 5)인간 6)천 7)성문 8)연각 9)보살 10)불의 세계가 된다. 이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와 아수라, 인간, 천의 세계는 범부(凡夫)가 스스로 지은 업(業)에 따라 생사를 거듭하며 끝없이 윤회하는 '헤맴의 세계'이며, 성문, 연각, 보살, 불의 세계는 오랜 세월동안 수행한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 성자(聖者)의 세계인 까닭에 '깨달음의 세계' 라고 한다. 이 가운데 6번째인 천(天)이 사천왕의 세계이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서 이 세계의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며 불도(佛道)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그 분 휘하의 부하들은 천지를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선악을 모두 살펴서 그 결과를 보고하고 사천왕 자신들은 직접 제석천(帝釋天)에게 보고하는 중대한 일을 맡고 있다.
사천왕 한 분 한 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도사 사천왕상 : 북/동 | 통도사 사천왕상 : 남/서 |
범어사 사천왕상 : 북/동 | 범어사 사천왕상 : 남/서 |
다문천왕(多聞天王) : 수미산 북쪽을 지키는 천왕으로서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 곁을 멀리 떠나지 않고 부처님의 설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해서 다문천왕이라 한다. 그의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손에는 늘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야차(夜叉)와 나찰(羅刹)을 부하로 삼고 있다.
지국천왕(持國天王) : 수미산 동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내리며 늘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켜 준다하여 지국천왕이라 한다.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은 허리를 짚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의 부하로는 부단나(富單那)와 건달바(乾達婆)가 있는데, 건달바는 육체가 죽은 뒤 다른 육신을 받는 태어나기 전의 영혼의 신이며 술과 고기를 먹지않고 향기만 맡고 사는 음악의 신이다.
증장천왕(增長天王) : 수미산 남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고 있다하여 증장천왕이라 한다. 오른손에는 용을 쥐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으며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그의 부하로는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는 구반다와 아귀의 두목인 폐례다가 있다.
광목천왕(廣目天王) : 수미산 서쪽을 수호하는 분으로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무리들을 몰아낸다고 해서 광목천왕이라 한다. 광목천왕은 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한다. 몸은 여러 가지 색깔로 장식되었으며 입을 크게 벌려서 큰 소리와 웅변으로 온갖 나쁜 현상을 물리치고 있다. 그의 부하로는 사람과 용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비사사(毘舍寐)라는 귀신이 있다.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에서 보면, 사천왕의 방위와 피부색은 중국의 전통사상인 목화토금수의 오행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행의 방위 중 중앙(토)에 해당하는 색깔은 무엇인가? 바로 토(土)의 깔인 황색이다. 동서남북, 청백적흑의 사천왕은 바로 중앙의 황금색을 띤 부처님을 수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