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사의 하루

산보와 울력

by 황보근영 2023. 6. 20.

앞글> 사시공양

산사의 대중 생활 가운데 산보(散步)처럼 자기만의 호젓함을 느끼는 시간도 없다. 절은 대게 산에 있잖는가. 향기 좋게 피는 야생화 사잇길의 여름 산보,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의 가을 산보, 토끼가 힘들여 뛰는 눈길의 겨울 산보. 밟히는 작은 이끼의 망울져 터져나가는 생명의 신비를 바라보는 일이거나 진달래와 산수유가 피어나는 봄의 산보.

 짧은 산행이라 차림 그대로여서 좋고, 목적이 없으니 바쁠 것 없어 홀가분하다. 경을 보든, 선을 하든, 가부좌 틀고 앉는것이 수행자의 몸가짐, 휘적휘적 걸어 근육을 푸니 정진에 힘이 붙어 좋다. 혹 고참 납자를 모시고 산보를 가면 깊은 정진의 경험을 듣게 되어 유익한것이다.  

가는 길에 목을 축이고, 송광사 감로암 물확

 울력(運力)의 종류는 많다. 비 새는 지붕 기와를 갈고, 허물어진 굴뚝이나 담장 그리고 헌 기둥이나 서까래 갈아 끼우는 영선(營繕)의 일. 채소밭 김매는 일, 모심기, 가을 걷이 등 농감(農監)과 원두(園頭)의 일, 나무 심고 나무하고 산불 나면 달려 나가는 산감(山監)의 일. 

채소밭 김매기 울력 또한 수행이라

 선방은 선방대로, 강원은 강원대로, 종무소는 종무소대로 잦은 울력이 있지만, 대중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큰 일은 아침 대중 공사로 결정하고, 시간이 되면 큰 목탁 세 번쳐서 대중을 운집하여 울력을 한다. 밭일은 원두 스님, 논일은 농감 스님, 산일은 산감스님이 인솔하고 지시한다. 울력은 1~2시간이면 끝난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날이나 정대불사(頂戴佛事)등 큰 불사는 며칠을 두고 총동원된다. 울력은 분명 일이다. 살림에 보탬이 된다. 절약하고 검소하지만 더 절약하고 검소하라는 산 가르침이다. 일할 때도 기봉(機鋒)*은 살아 있어야 한다. 

 산보든 울력이든 굳이 일 없으면 일을 꾸미지 않는다. 각 스님의 요사채나 승방에서 묵언참선을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공부를 하는 것도 또한 산사의 오후를 즐기는 일이다.

 이제 서산으로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산사가 안긴 산은 어머니처럼 저녁 공양 연기를 품고 있다. 

승방에서 묵언참선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도 산사의 오후를 즐기는 일이다.
일 없으면 일을 꾸미지 않는다. 茶禪一味, 차를 마시는 것도 또한 선(禪)이라.
2002년 불일암을 찾았을 때 스님은 차를 내 놓으시며 손님을 맞아주셨다. 미소는 다정하지만 눈빛의 기봉은 예리하다. 이름이라도 기억해둘 걸...하기사 그 이름이 무슨 소용있으랴? 분명 법정 스님을 이어 후일, 한소리 하실 큰 스님이 되실 것이다.

*기봉>  창이나 칼 따위의 날카로운 끝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기(機)는 수행에 따라 얻은 심기(心機), 봉(鋒)은 심기의 활용이 날카로운 모양으로 선객(禪客)이 다른 이를 대할적의 예민한 활용을 말한다.

 

뒷글> 약석과 저녁예불

'산사의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선 죽비(放禪竹扉)  (0) 2023.06.20
약석과 저녁예불  (0) 2023.06.20
사시공양(巳時供養)  (0) 2023.06.19
청소와 오전 정진  (0) 2023.06.19
아침 공양  (1) 2023.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