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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三寶)상 - 원융삼점 '삼'이란 숫자는 우리 겨레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천지인 3재(天地人 三才)가 그렇고, 환인,환웅,단군 3신(三神)이 그렇다. 불교에서도 3은 길한 숫자로 나타난다. 삼보, 삼법인설, 삼신불, 삼세불, 삼존불 등이 그렇다. 삼보(三寶)상은 3보(寶)를 상징한다.삼보란 부처님, 부처님의 진리, 부처님의 제자를 뜻하는 불법승(佛法僧)을 가리킨다. 또한, 삼보는 열반의 경지에 들 수 있는 비밀장을 말한다. 곧 비밀장이라 함은 삼조의 세점과 같이 해탈의 법과 불신과 평등의 대지혜가 합하여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의미한다. 이 '해탈의 법'이나 '불신'이나 '평등의 대지혜', 그 어느 것이든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서 단독으로는 '열반'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법이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말.. 2023. 4. 23.
일원상(一圓像) 선종 혹은 선종에 속하는 사원이나 승려들은 둥근 원을 사용하여 일체 중생의 마음이 두루 평등함을 표상하였는데, 이것을 일원상(一圓像)이라고도 한다. 원은 우주만유의 근본자리요, 모든 불·보살의 마음자리이며, 일체중생의 불성자리인 동시에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요, 나고, 죽고, 가고, 오는데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의 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다. 또한 언어와 명상이 빈(공) 자리며, 우주만유가 원만하며 구족하고 지공하여서 무사한 자리이다. 참고로 일원상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의 대각으로 밝혀진 최고 종지를 의미하는 원불교교리의 상징이다. 불상이 부처님의 형체 (形體)라면,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 (心體)다. 원불교(圓佛敎, Won-Buddhism)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이 창시.. 2023. 4. 23.
만(卍) 상 卍은 '만(卍) '이라고 발음한다. 인도의 말로는 '스바스티카;라고 하여 원시 불교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길상을 표시하는 기호이다. 부처의 마음, 대자비의 마음 또는 중생들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불성(본마음)의 근본적인 마음 자리를 설명하는 기호로 쓰여지고 있다. 일설에는 부처님이신 고타마 싯다르타 보살이 6년 금식고행의 수행생활을 청산하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아 먹게 되었는데, 끓이고 있는 우유죽 위에 '만(卍)'자와 같은 상서러운 표적이 나타났다한다. 이렇게하여 끓인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드시고 기운을 회복한 보살은 보리수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명상에 들어가니 새벽이 되자 '더 이상의 위없는 깨달음(무상보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만(卍)'자는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한다. 2023. 4. 23.
보살상과 지물 보살이란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역한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그 뜻은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지혜를 가진 자’ 등으로 풀이된다. 성불하기 위해 수행에 힘쓰는 보살은 '위로는 부처를 통해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일이다. 대승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서원(pranidhana)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맹세와 소원이며, 회향은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하여 헌신하며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 것을 자원하여 일체의 중생을 먼저 깨달음의 세계(彼岸.. 2023. 4. 23.
대웅전(大雄殿)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주문을 지나왔으며, 온갖 산소리 물소리를 건너며 수미산을 오르는 이 구도자는 갖가지 유혹을 떨치며 천왕문을 지나 이제 더 이상 중생과 부처가 나뉘지 않는 불이문을 들어오니 부처님 계신 불국정토에 하나가 되었다. 이제 부처와 내가 하나되어 만나는 법의 전당에 들어선 것이다. 이곳이 바로 영원한 자유와 해탈의 진리(Dharma)로 가득찬 진리의 전당, 곧 법당(法堂)이다. 부처님은 한 분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세상을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이 수많은 부처님을 모신 곳을 법당이라 한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석가.. 2023. 4. 23.
불상과 수인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는 여러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 나타나신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모습 속에 부처님의 마음이 있다. 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나도 없고 너도 없으니 일체가 여여(如如)하여 나눔이 없어 본래 빈 것(空)임을. 이제 산문을 지나 부처님 전에 다다랐건만 아직도 부처님을 선뜻 뵙기가 민망하다. 중생의 습기(習氣)를 차마 씻어내지 못하였고 일심(一心)은 아직 분주하다. 그리하여 부처님 마음 전하신 징표를 내 마음에 새기면서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부처님 전에 나아간다. 옛 조사들은 '단박에 깨친다(頓悟)'하였건만 어리석은 중생은 어림반푼 어치도 없다.'불'이란 붓다의 약칭이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며 여래라고도 한다. 보통 부처라하면 석가모니불을 이르지만 경전에 보이는 부처만 해.. 2023. 4. 23.
'가는 중',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작은 암자에 들렀습니다. 말이 암자라지만 벼랑에 쪼그리고 앉은 작고 초라한 오두막집이었습니다. 비로암에는 그렇게 닮은 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아니 온 듯 다녀 가려고 조용히 들렀는데 귀 밝은 선승이 문을 열고 나오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마루에 걸터 앉아 땀을 닦고 배낭 속의 방울토마토를 꺼내서 같이 들자며 권했습니다. 스님께선 먹을 때가 안 되었다며 사양하셨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권하니 이번엔 계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쭸습니다. "혼자 계신데 무슨 계율입니까? 누가 뭐랍니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죠." 그냥 소박한 모습대로 쉽게 사시는 줄 알았더니 칼을 지닌 선승.. 2023. 4. 19.
불이문(不二門) 일주문을 들어오면서 일심을 다잡고, 피안교를 건너며 중생의 속진을 씻어내고, 천왕문을 지나면서 청정한 일심을 다시 한번 기약하였건만, 그래도 모자란다. 진리는 하나이며 일심으로 돌아간다며 스스로 다짐하고 달래었건만 어림반푼도 없다. 중생의 습기(習氣)는 자꾸만 성속은 나누고 자타를 구분하며 선악을 분별한다. 이제 부처님 전에 드는 마지막 문에 이르렀다. 이제 또 다시 더 이상은 '둘이 아닌'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전에 다다랐다. 이 문을 불이문이라 한다. 크나큰 근본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하나를 깨달으면 백 가지에 통할수 있다(一通百通). 잘 생각해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며,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며, 부처와 내가 둘이 아.. 2023. 4. 19.
천왕문(天王門) 물소리, 새소리, 떨어지는 나무 잎새에 감상이 젖고 가파오는 숨결에 구도의 일념이 흐릿해져 갈 때쯤이면 수미산 중턱에 다다랐다. 이제 이 구도자는 수미산 중턱에서 부처님 세계를 사방으로 수호하는 네 분의 천왕님이 계신 천왕문에 발을 내딛는다. 어린 마음에는 크나큰 덩치에 눈을 부릅뜨고 창, 칼을 들고 계신 분들이라 무서운 생각이 들어 피하고 싶었지만 실은 사천왕님은 착한 이를 도와주고 악한 이를 꾸짖는 고마운 분들이시다. 무섭다는 생각을 떨치고 눈여겨 바라보면 그분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상통하여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한분 한분 차례로 우러러 뵈며 합장하여 인사드린다. 이로써 구도자는 청정일심을 다시 다잡아 청정도량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니 가슴이 벅차기만 하다. 부처님 전에 다가가는 산사의.. 2023. 4. 19.